[중등학교교장중국문화체험]중국 산동성을 주유하다 -배수열-
본문
1. 일정 : 2016년 7월 27일(수) ~ 8월 5일(금), 9박 10일
2. 여정 : 곡부(취푸)->태안(태산)->제남->유방(웨이팡)->청도(칭다오)
◆ 한 통의 전화
지난 7월 초순에 동서대학교 박*영 입학처장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왔다. 공자아카데미에서 주최하는 9박 10일간의 중국 체험 연수가 있으니 참여할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용은 왕복 항공비와 비자비, 여행자 보험을 포함해서 주관여행사인 아주월드투어에 452,100원을 송금하고 전세버스 900RMB와 태산관광비(입장료, 케이블카) 500RMB 및 태산 숙박비(신게호텔伸憩宾馆) 550RMB, 합 1,950RMB(약 330,000원)를 준비하여 중국 현지 여행 책임자에게 지불하면 되고 그 나머지 비용 즉 8박의 호텔비, 9일간의 식비, 연수체험경비 일체는 중국 국가가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경비 측면에서 귀가 솔깃했고 정년을 몇 달 앞둔 상황이기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의논하니 아내는 흔쾌히 다녀오란다. 그런데 문제는 직장인 학교가 걱정이었다. 지난 6월 6일부터 7월 15일까지 교장 자격연수를 받느라 학교를 비웠는데 또 10일간 학교를 비워야 한다니, 한편으로는 나도 양심이 있는 데…,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7월 27일(수)에 중국 연수를 떠나서 돌아오는 8월 5일, 그 기간은 1, 2, 3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이고 또 그 기간에 교감과 행정과장도 연수중이라 관리자 모두 학교를 비우고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 딱 감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비행기는 청도를 향하여 이륙하다.
7월 27일 09:00경에 김해 국제공항까지 전송 나와 짐을 실어준 아내와 작별인사를 하고 국제선 2층 대한항공 수속대 근처에 가니, 함께 9박 10일 동안 여행할 나를 포함해서 11분, 즉 지*고등학교 배*진, 데*사여자고등학교 김*홍, 양*여자중학교 강*권, 울*상업고등학교 손*재, 울*이화중학교 조*철, 창원*산중학교 박*숙, 창원경*여자고등학교 장*원, 초*중학교 이*경, 덕*여자고등학교 공*식 교장 선생님과 동서대학교 김*기 교수님(인솔 책임, 공자아카데미 원장 010-7797-0057)을 만났다. 남자 9명 여자 2명 총 열 한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고등학교 배*진 교장과 울*이화여중 조*철 교장 선생님은 오는 8월말에 정퇴하고, 데*사 김*홍 교장, 창원*산중 박*숙 교장과 나는 오는 2017년 2월 퇴직이고, 2017년 8월말에는 덕*여고 공*식 교장이 정퇴로 거의 교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행처럼 느껴졌다.
처음 만나 뵙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인사를 나누니 자기들끼리 정했다며 나더러 연수생 반장이 되어 그 역할을 하란다. 웃음으로 승낙을 대신하며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 절차를 밟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밝은 얼굴로 아무런 부담없이 이번 중국 체험연수에 참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불안, 초조…, 그런데 지금 걱정해서 뭐 하나? 모든 걸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오자. 전송 나온 동서대학교 전*희 씨(051-320-2675)에게 그 동안 이번 연수 주선에 수고했다고 인사하며 탑승 절차를 진행했다.
11:30 대한항공 KE889편, 좌석번호는 43c로 드디어 중국 청도를 향하여 이륙했다. 포근히 안아 줄 것만 같은 양털 구름을 내려다보다, 그제야 전*희 씨가 이번 여행에 대해 안내한 것들을 차근차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연수의 전(全) 일정 숙소는 2인 1실의 4성급 호텔이며, 단체 비자를 이용하기로 되어 있다. 무더운 현지 날씨에 대한 준비, 여권 챙기기, 편안한 복장(단, 산동대 환영 만찬 시에는 단정한 복장) 준비, 개인 약품 및 세안도구도 준비, 노트북, 보조배터리, 건전지, 외장하드, USB, 라이터 등은 기내에 들고 타는 가방에 넣어야 한다는 것 등이 전*희 씨의 안내였다.
13;10분(현지 시각)경 청도에 도착하였다. 청도 공항이 부산 김해공항보다 작게 보였다. 공항에서 물건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한 번 더 소지품을 검색했다. 다른 공항에서 하지 않는 절차다 싶었지만 그 곳의 절차에 따를 수밖에〜. 13:20분경 버스에 몸을 싣고 조금 있으니 충남대학교 공자 아카데미에 수학하고 있는 대전광역시 교장 선생님 7분과 정진모 중국어 현지 교사 합 8명이 동승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충남대 공자학당과 합동으로 중국 답사를 하게 된 것은 부산 동서대학교 공자학당 중국 측 원장과 충남대 중국 측 원장이 부부 사이여서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함께 하는 즐거운 연수가 되길 바랐다.
14:05 청도공항 부근의 중국 식당에서 풀코스로 점심식사를 했다. 음식에 중국 특유의 향이 없고 맛있었다. 중국 공무원들은 정부의 지시를 잘 따르는가 보다. 인솔자가 우리 일행에게 식사 제공은 해도 술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인 즉 중국 정부에서 식사에 술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개인 돈으로 내는 술은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단다. 아울러 호텔도 아무리 귀한 손님이 와도 4성급 이하에만 숙박이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6월에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 그 나라 특유의 음식이 없이 그냥 한국식 음식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다행히도 중국에는 회전 식탁에 중국 고유의 음식, 각 성마다 향료를 많이 넣든가 적게 넣는 특징을 살리는 등, 하여튼 중국 특유의 음식이 있으니,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고, 사실 여행 내내 중국 음식만 먹었고 아예 우리 한국 음식은 구경조차 못 했다.
◆ 산동성 곡부(曲阜)시로 가는 길목에서
점심을 먹고 청도시 앞 바다에 건립된 해만대교(海湾大桥)를 건넜다. 2005년 6월에 착공해 총 약100억 원이 투입된 이 다리는 총 길이 41.58km로 청도와 황도를 연결하며 너비가 35m, 쌍방향 6차선으로 갖가지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로, 우리나라의 인천 앞바다를 가로질러 현재의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를 연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잇는 인천대교를 세계 어느 교량보다 길다고 자랑스러워했는데, 지금 건너는 청도의 이 다리가 총 길이는 18.248km의 인천대교와 비교가 안 되게 길어 좀 질투가 나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는 차량의 맨 앞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의 모습을 바라본다. 파도도 거의 없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고기잡이배들만 한가하게 떠다니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였다. 그들도 이 바다를 우리와 마찬가지로 황해라고 부른다고 안내자는 일러 준다. 다리를 건너오니 황도(黃島)라는 섬에 다다랐다. 이 섬에는 곳곳에 아파트가 있고 지금 한창 건설 중인 아파트도 많다.
이번 중국 산동성 여행에서 우리나라 7-80년대처럼 아파트 등 각종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 일행이 보람되고 즐거운 연수가 되도록 산동대학에서 파견한 중국인은 4사람이었다. 인솔책임자는 중국 산동대학교 공자학당을 담당하는 실무자이고, 통역을 맡은 한이명(韓伊鳴)은 산동대학교 한국어과 3학년 여학생이고, 또 한 사람 우리들의 도우미는 산동대학교 마케팅과 2학년인 범영생(范英生) 남학생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우리를 이곳저곳으로 태워주는 운전기사다. 이들은 9박 10일의 연수 기간 동안 우리를 위해 부족함 없이 도와주었고, 이에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16:10, 휴게소에 들렀다. 고속도로 휴게소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휴게소와는 비교조차 하기 싫었다. 먼저 화장실부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 불결했고, 그래서 그런지 휴게소에 들리는 차들도 별로 없었으며, 음식점의 차림이나 과일 등을 파는 가게의 전시(展示)와 포장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특히 화장실이나 음식점 등의 출입하는 곳에 가림막을 설치해 둔 것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그 가림막이 몸에 닿는 것이 싫었고 헤치고 드나드는 것도 귀찮았다. 휴게소에서 약 20분간 쉬었다가 안녕을 고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장시간 버스 여행의 고충을 알았던지 동서대학교 공자아카데미 원장이신 김영기 교수의 공자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그 특강 내용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가는 중국 산동성 곡부시는 공자의 고향으로서 공자의 후손들이 사는 공부(孔府), 공자 일족들의 무덤이 30만기 정도나 있는 공림(孔林), 그리고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가 있다.
공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과 안 씨 집안의 무당의 셋째 딸 16살 먹은 처녀와 야합으로 2650년 전에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숙량흘의 나이는 70살이 더 되었고 그 어머니는 16살이었는데 그들의 결혼은 야합이었다. 이 때 야합이란 정식 결혼이 아닌 것이다. 리얼하게 표현한 것이 ‘야합’인데 당시는 모계사회로 출생의 신비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최근의 어느 학자의 주장은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인데 그 ‘송(宋)’나라의 풍속에 교매, 즉 교외에서 중매하는 풍속이 있었다. 음력 2월에 국가적으로 인구를 늘리기 위한 행사로서 남녀 짝짓기 행사를 했다. 그 날에는 남녀 모두 먹고 마시고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맞으면 신방을 차렸다.
70살도 더 된 노인인 숙량흘은 비록 백발이지만 기골은 장대한 사나이였다. 첫째 부인에게는 딸이 9명이었지만 아들이 없었고 첩에서는 아들 1명이 있었지만 장애인이었다. 지체장애인으로서 절름발이였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했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에 세 번째 부인으로서 무당 딸 중 셋째 딸인 안증제라는 여인과 신방을 차렸고, 그 부인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니구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던 중 진통이 와서 공자를 낳았다. 혼자서 공자를 낳은 안 여인은 공자를 굴에 숨기고 기어서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여 산으로 올라가니 공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찾으니 니구산 동물인 매가 날개로써 아기를 감싸고 호랑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인(聖人)이다. 공자는 예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필생의 역량을 집결했으며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그 역할을 다 했다. 공자는 인(仁)을 주장했다. 인(仁)을 가진 사람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고 했다.
김영기 교수는 이어서 맹자와 공자의 사상 비교, 묵자를 비롯한 당시의 철인들의 이야기로 길고 지겨운 버스 여행에 청량제를 제공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곳곳에 풍력발전 설비가 많다. 핸드폰 중개소도 종종 볼 수 있다. 송전선도 보이고 청도에서 서부 즉 곡부시로 갈수록 산들이 점점 눈에 많이 들어온다. 하늘에는 간혹 구름이 떠다니고 집들은 대개 붉은 색으로 지붕을 단장했다. 가도 가도 밭의 연속이고 농약 분무기를 짊어진 농부가 밭에 농약을 뿌리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 농촌과 한낱 다를 바가 없다.
화물차들은 우리나라 화물차들보다 길어 바퀴도 많이 달렸다. 아마 땅이 넓으니 장거리 화물을 운송하기 위함이겠다. 멀리서 볼 때 산인가 해서 다가갔더니 산이라기보다 조그만 언덕이라 해야겠다. 농촌의 들판이 푸르고 갖가지 농작물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처럼 비닐하우스로 농사를 짓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자연의 혜택을 그대로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 도로는 정말로 곧게 뻗었다. 그래서 지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도로는 평지보다 상당히 높여 만들었는데 이곳 중국의 도로는 평지와 거의 같은 높이로 건설했다. 곡부시 가까이 가니 비닐하우스 농장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에 비하면 조잡하고 그 규모도 작다. 5시간을 버스로 달려도 터널 하나 없이 곧고 평탄한 길이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를 안고 계속 달렸다. 고속도로 안내판에는 대형차는 시속 100km를 허용하고, 소형차는 시속 120km를 허용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과속단속 카메라는 눈에 띠지 않는다.
18:00 경 곡부 상그리호텔(闕里賓舍)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여독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룸메이트
일반적으로 여행 시 숙소에서 제공하는 방은 2인 1실이다. 부부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여행 중 룸메이트가 누구인지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이번 여행 9박 10일 동안의 룸메이트는 덕*여고 공*식 교장 선생님이셨다. 늘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뽀스락거리기도 하고 일찍 일어나 잠을 깨우기도 하는 등 나의 못된 버릇으로 잠자리를 편치 못 하게 하는 등 신경을 거슬리게 해도 룸메이트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으심이 나의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 공 교장 선생님께서도 나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코골이어서 서로 피장파장이라 부담이 적었고 짬이 나면 이것저것 세상사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고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많은 주량은 아니지마는 약간의 약주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이번 여행을 즐겁게 했다. 어쨌든 처음 만난 룸메이트를 여행을 마친 이 시간에도 보고 싶으니 참으로 좋은 우정을 쌓은 것 같다. 룸메이트에게 감사드린다.
◆ 곡부(曲阜)에서 공자를 만나다
오늘은 7월 28일 목요일 중국 연수 둘째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했는데 한 30분간 이곳저곳으로 발걸음 가는 데로 걷고 나서 어디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더니 그 참! 호텔이 얼마나 큰지 결국 호텔 경내였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은 곡부시에 있는 최고의 호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2015년에 묵고 갔다는 사진을 게시해 두기도 했다.
07:00 호텔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7시이면 호텔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하고 09:00가 되면 여행지로 떠나는 이번 여행은 일반적으로 가는 패키지여행보다 여유가 있었다.
09:00 조선족인데 요녕성 사람인 곽연자 씨가 오늘 행사의 통역으로 소개되자 곽 씨는 우리 일행을 오전 행사 장소로 안내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공자 문화 강좌를 개최하는 날이다. 개최 장소가 예사 곳이 아니었다. 지금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 곡부의 최고 호텔이지만 2013년까지는 오늘 행사가 열리는 궐리호텔(Queli Hotel)이 곡부시 최고의 호텔이라 했다. 1996년 이곳 곡부에 온 김대중, 노태우, 장쩌민 등이 이 호텔을 이용했다고 한다.
09:20, 궐리호텔(Queli Hotel)에 도착하니 중학교 선생님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인 곡부사범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작하다가 지난해에 정년퇴직한 장배성(張培成) 교수께서 공자에 대해 문화강좌를 하셨다.
● 공림을 찾다
11:00까지 공자 문화 강좌에 참여했다. 11:35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서니 일반 자전거, 원동기 달린 자전거, 오토바이, 마차 등등 별별 운송 수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다운 모습이라 여기며 11:50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에서는 향신료 및 기름을 제거한 음식을 제공했는데 이는 특별히 우리 한국인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한 것이라 하니, 식당의 배려에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다.
13:00 식당에서 출발하여 공림을 찾았다. 공림 내를 운행하는 전동열차를 타고 공림을 두루 살폈다.
◀ 공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
공림은 공자와 그 가족들만 묻힐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 묘지였다. 공림에는 지난 2,400여 년간 재배되고 보호받아 온 송백과 갖가지 고목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었다. 이처럼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웅대한 가족 묘지도 공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겨졌다.
대개의 무덤이 비석만 있고 무덤의 봉분은 잘 보이지 않거나 있는 봉분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인지는 의문이 가지만 공림에는 뱀이나 쥐가 없는 것이 특색이라 했다. 이는 송백(松柏)의 특유의 향 때문일까?
◀ 공림 속 공자의 무덤
● 공부(孔府)를 찾다
공림이 70만 평이나 되는 부지이지만 전동열차를 타고 일정한 코스를 도니 시간은 그렇게 많이 소요되지 않아 곧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집인 공부(孔府)를 돌아보기로 했다. 공림에서 나와 날씨가 너무 더운 관계로 오전에 세미나를 했던 궐리호텔에서 잠시 쉬었다가 공부(孔府)를 찾았다.
공부 입구에서 중국 토종 아카시아 나무가 우리를 맞았다. 가시가 없는 것이 그 아카시아 나무의 특징이라 하여 다시 한 번 보았다. 공부(孔府)는 공자(孔子)의 직계 장자와 장손이 사는 저택으로 공묘(孔庙) 동쪽에 있었다. 중국 명(明), 청(淸)시기의 황제 궁실 다음으로 큰 규모의 저택으로, 공자 후손의 봉호(封号)가 날로 높아감에 따라 그 저택도 계속 확장되어갔다고 한다.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공자의 46대손을 “연성공(衍圣公)”으로 봉했고, 이때부터 이 저택을 “연성공부(衍圣公府)”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대지 점유면적 16만㎡에 남북 간 길이가 2㎞이며 방의 수가 463칸에 이른다. 웅장함은 없으나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다양한 문물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과거 황제의 성지(圣旨)를 맞이하는 중광문과 황제의 성지(圣旨)를 읽거나 관원의 접견, 중대한 안건을 처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공부대당(孔府大堂)도 탐방했다.
◀계탐도 : 모든 발에 보물들이 있는데도 욕심을 부려 태양까지 욕심을 내고 해로 돌진하다가 타 죽었다는 상상의 동물인데, 탐욕을 경계하라고 공부(孔府)에 그려져 있음. 고위관직을 가진 벼슬아치의 집에는 꼭 그려지는 그림이라 함
공부(孔府)에는 아직도 공자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면서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날씨가 너무 더웠다. 본래 계획은 오늘 공묘(孔廟)에도 탐방하기로 했으나 내일로 미루고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덕분에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중국의 명물 발마사지를 즐길 수 있었다.
◆ 공묘(孔廟)와 태산이 기다리는 날
● 공묘(孔廟)를 찾다
7월 29일 금요일, 오늘은 중국 연수 3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도 6시경 잠자리에 일어나 호텔 경내를 거닐었다. 호수에 낚시한다든가 산보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 공묘로 들어가는 성 입구
아침식사 후 09:00에 어제 못 간 공묘(孔廟)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어제처럼 곡부명고성(曲阜明故城)이라 써둔 문을 지나 궐리빈사를 거쳐 공묘(孔廟)로 갔다. 공묘 입구에는 지성묘(至聖廟), 즉 최고의 성스러운 사당이라는 현판이 버티고 있었다. 공묘(孔廟의 면적은 21만평 정도 된다고 했다. 임금이 사는 궁궐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금색지붕이 나도 황제 못지않다고 자부심을 드러내는 듯 눈부시게 빛났다.
공묘(孔廟)에도 공림(孔林)처럼 주로 향나무나 측백나무를 정원수로 사용했는데, 그 사연은 논어에서 ‘세한연후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즉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즉 志士(지사)의 훌륭한 뜻과 기상은 나라가 어려울 때에야 알게 된다는 뜻을 더욱더 기리기 위함이라 했다. 사실 그런 큰 뜻이 아닐지라도 그리고 이들 나무는 오래 살고 사시사철 푸르며 벌레의 피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공묘의 정원수로 안성맞춤이 아닌가 여겨졌다.
대중문(大中門)을 들어서니 오른편에 매우 큰 비석이 있었다. 무려 65t이나 된다고 했다. 중국 북경에 있던 돌을 곡부까지 물로 뭍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이 비석을 성화비라 하는데, 그 비석의 용조각에 발톱이 5개로 새겨둔 것은 바로 임금을 상징한단다.
공묘(孔廟)의 대성전 입구에 살구나무나 은행나무(행단(杏壇)는 공자가 제자들을 그 나무들 밑에서 가르친 것을 상징한다고 하니 문득 꿈도 해석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총 5개의 큰 문을 지나 대성전(大成殿)에 도달했다. 대성전은 자금성으로 치면 태화전,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전에 해당하는 정각이었다. 대성전(大成殿) 안에는 공자의 상이 모셔져 있어, 동양 사상의 지주되어 왔음에 고개 숙여 큰절을 올렸다.
공묘(孔廟)의 모든 정자와 전각들은 붉은 벽과 황색 지붕, 그리고 흰 대리석을 조각한 중국 전통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유교 사상이 동아시아로 퍼져 나가면서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일본까지 공자의 사당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 나라의 공자의 사당들은 취푸(곡부)에 있는 공묘를 본떠서 지은 것으로 문화의 힘이란 어디 총칼에 비유할 수 없는 큰 위력을 가진 것으로 알 수 있었다.
11:00, 호텔에 도착하여 12:00에 점심식사를 했다. 13:00 버스타고 평소 그리며 말만 듣던 태산을 찾아 나섰다. 태산이 있는 곳은 산동성 태안시로 13:50분 고속도로를 들어서 태안시로 향했다.
◀ 공자가 기거하던 집앞에 세워진 노벽. 역대 중국인 중에서 공자를 싫어한 사람은 진시황과 등소평 2명이라고 하였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킬 때 벽에 숨겨 놓았던 책이 그 후 발견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벽을 설치했다고 한다. 노벽에서 나온 책은 논어와 효경 등이었다.
▶ 2016년 7월 28일, 카톡으로 지인에게 보낸 메시지
중국은 참으로 큰 나라이네요. 차를 탔다 하면 4~5시간 타는 것은 예사이고 광활한 평야는 조금, 아니 엄청나게 질투 나게 하고요. 어제 청도에서 곡부까지 5시간을 달렸지만 어느 쪽을 봐도 산이 없고 낮은 언덕만 있으며 그래서 터널도 하나 없었습니다. 들에는 각 가지 곡식들이 한창 자란다고 푸름만 가득했고요. 우리나라와 시차가 1시간밖에 안 나 시차 적응에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자주 잠이 깨고 또 일찍 깨어 곡부 시내를 산책하러 나갔는데 한 30분 돌아 다녔나?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묵고 있는 호텔 경내만을 산책한 것 같아요, 곡부 상그리호텔이라고 명패를 붙여두었는데 참으로 어마 어마한 규모에 넓은 땅, 그런 저런 이유로 중국 놈들 콧대가 자꾸만 높아지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이곳 더위와 우리나라 더위는 거의 비슷한 것 같아 참을 만합니다. 오늘은 곡부 공자의 사당으로 간다고 합니다. 평소 한 번 참배하고 싶었는데 오늘 가서 평소의 소망을 풀까 합니다. 시간 나는 대로 중국 여행 이야기 할래요. 재미없어도 재밌게 ~~~, 오늘도 즐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태산을 찾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이정표를 보니 상해와는 760여 km이고 북경과는 400여 km라 했다. 태안시에서 북경이 더 가까운가 보다. 태산이 있는 태안시에도 아파트가 많이 눈에 띠었고, 한쪽에서는 아파트 건립이 한창이었다. 태산의 정상을 향하여 꼬불꼬불 험한 길을 숨죽이며 올라가다 버스에서 내리니 해발 800m의 고지이고 여기서부터 해발 1,530여 m의 태산 정상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게 해 두었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600여 계단을 걸어서 태산의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이용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보는 태산의 모습은 정말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케이블카에 내려 정상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니 그 이름도 기발한 천외촌, 그래 하늘 바깥 마을이다.
천외촌으로부터 등산하여 오른 곳은 태산 정상에 위치한 신게호텔(伸憩宾馆)이다. 시설이 비좁고 낡아 불편했으나 우리 일행 이전에 이 호텔에 장쩌민이나 반기문(2015년 9월 4일)이 이용했다고 하며 태산 정상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호텔비는 550위안 우리 돈으로 10만 원가량 되었다. 숙박료가 좀 비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태산의 정상에서 잔다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관광자원 개발은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잘 하고 있었다. 케이블카 설치 등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잘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아울러 태산의 정상에 있는 각종 숙소와 종교 집단의 사당들이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고 태산과 한 덩어리로 보였다.
◆ 일출을 보는 환희는 사라지고
2016년 7월 30일 토요일 04:40, 기상(起床)하여 해맞이를 위해 일찍 일어났으나 안개가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래도 곧 안개가 걷히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해맞이 명소라는데 찾아 갔더니 모여든 사람들이 수백 수천 명은 됨직했다. 모두 어디서 숙박하고 이렇게 모였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중국인들도 한 마음으로 일출을 보기를 원했다. 결국 안개와 구름이 뒤범벅이 된 하늘만 쳐다보다가 숙소로 돌아온 07:00경 호텔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했다.
09:30 벽운사(碧雲祠)라는 종교 시설을 거쳐 어제와는 반대편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제남시 쪽으로 내려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태산이란 말을 들었고 이제 태산에 올랐으니 공자의 말이 떠올랐다.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적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적게 보인다는 말, 그 만큼 큰 꿈을 갖고 호연지기를 품으라는 말일 게다.
아래는 태산을 오르면서 태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셔틀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태산의 줄기들이 만든 계곡은 우리나라 무주구천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버스로 계곡을 따라 내려 온 시간이 2~30분이 더 되었다. 어제는 태산을 오르는 길이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었는데 오늘은 평탄한, 그렇게 꼬불꼬불하지도 않은 내리막길이었다. 계곡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복숭아나무가 유달리 눈에 띠어 이 골짜기를 두고 도화원(桃花源)이라 이름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11:20분경 셔틀 버스 출발점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우리 버스를 타고 제남시로 향했다. 방금 내려온 태산을 바라보니 저 멀리 태산이 부옇게 보였다. 날씨 탓이었다.
11:40,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나 제남 북경 방향으로 향했다. 또 다시 광활한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KTX가 고속도로 옆을 힘차게 지나가고 있다. 잠시 눈을 붙이고 깨어나니 엄청 큰 물류센터가 나타났다. 곧 고속도로에서 내려 안개 낀 제남시에 들어서니 1904년에 건립되었다는 성당이 먼저 눈에 띠었고 산동대학교 체육관이 우리를 맞이했다. 산동대학교는 중국 전체 대학교 중에서 10위 안에 드는 명문 대학교로 알려져 있으며, 재학생은 6만 5천여 명 정도라 했다.
우리가 며칠 동안 묵었던 제남시는 산동성의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로, 산동성의 중부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황하(黃河), 남쪽으로 타이산(泰山, 태산)이 있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세(地勢)를 보이고 있으며 면적은 8,177㎢, 인구는 700만 명 정도라 한다.
13:50, 산동대학교 중심 캠퍼스의 호텔에서 점심을 뷔페식으로 먹고 다시 시내로 나오니 더위 때문인지 윗도리를 벗고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이 많이 보였다. 수양버드나무 가로수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양버드나무가 제남시의 시목이라고 누군가 귀띔한다. 시내에는 2층 버스는 물론 1층 버스가 섞여 운행되고 있었고 여자 버스 기사도 눈에 띄었다.
◆ 천하제일 샘물의 도시 제남의 표돌천아 괄괄 솟아라
14: 00 제남의 중심부에 있는 표돌천공원에 갔다. 중국인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음식이나 샘물 등 많은 것들에 천하제일을 붙이기 좋아한다. 그래서 샘물도 천하제일 천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바로 제남에 있는 표돌천이다.
◀ 표돌천의 용솟음
이 표돌천은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 물로 차를 끓여 마시고 반했다는 물이다. 이런 연유로 표돌천은 샘물관광지가 되었다. 이 샘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이 표돌천에는 초당 1.6리터 물을 괄괄 뿜어낸다고 한다. 과연 샘물이 괄괄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원리를 지형학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 느껴져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0.5ha에 이르는 표돌천공원에 있는 여러 샘(34개)마다 물이 '송~송' 솟구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물이 맑아 바닥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샘 외에도 표돌천공원에는 송나라 때 여류시인인 이청조기념당을 비롯해 관란정, 봉산구적방, 백설루, 만죽원 등 둘러 볼만 한 곳이 많았다. 표돌천 입장료 40위안, 약 한화 약 8천원이나 되었지만 아름다운 공원이기에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17:00 제남 시내 중심부라 여겨지는 곳에 있는 하얏트 리젠지 호텔에 투숙하여 여장을 풀었다. 과연 최고급 호텔답게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비품 모두가 고급스러웠다. 이렇게 고급 호텔에 투숙하게 해준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 하얏트 리젠지 호텔의 입구에서
18:30 산동대학 공자아카데미 부연수원장, 연수팀장, 연수실무원 등과 함께 호텔 내에 있는 대형 만찬장에서 우리 일행의 중국 연수 환영 만찬을 하였다. 산동대학교 관계자들의 환영 인사 등 공식적인 의식 후 즐거운 환영 만찬회가 베풀어졌음에 감사인사를 드린다.
20:30, 만찬을 끝내고 제남 시내의 야경도 볼 겸 마트를 찾았더니 많은 물건을 전시해 둠은 물론 고급스러운 물건도 많고 화려한 물건도 많아 눈이 둥그레졌다. 중국은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자유 경제를 그대로 실천하는 나라였다.
◆ 산동성박물관에 놀라고 우리와 닮은 중국의 현실에 공감하다
2016년 7월 31일 일요일, 07:00 아침식사를 호텔 뷔페식으로 하고 09:00 로비에 나가니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이어서 그런지 차량이 얽히고설키어 아주 번잡했고 거기다가 어떤 두 차량의 접촉 사고까지 있어 더욱 혼잡했는데, 그러한 거리를 겨우 빠져 나와 도착한 곳이 산동성박물관이었다. 산동성박물관에 도착하니 10시나 되었고 날씨가 더운 일요일이어서 박물관에 피서 겸 구경 온 관람객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예약하고 왔는데도 입장하는데 30여 분이 걸렸다.
◀ 산동성박물관
그리고 중국에 오니 호텔, 박물관 등 어디를 가나 우리의 여권과 비자를 요구했다. 좀 기분이 안 좋았다. 입국할 때 검열했으면 되었지 왜 가는 곳마다 검열하는가? 그건 그렇고 산동성 박물관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혀를 내둘렀는데 중국에는 이보다도 더 큰 박물관이 많단다.
산동성박물관을 관람하고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
‘입이 쩍 벌어지는 산동성박물관입니다. 떼놈들! 앞으로 큰 일 칠 ~~놈들’ 참으로 중국은 땅덩어리도 넓거니와 건물 등도 웅장하고 큰 것이 질투 나게 합니다. ‘
12:00 산동성박물관의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날씨는 무척 더웠다.
14:10, 점심으로 중국식 샤브샤브와 맥주를 마음껏 먹고 중국 산동대학교 연수원 6층으로 갔다. 15:00 산동대학 교수가 중국의 사회, 경제, 교육의 실상 및 현황을 파워포인트로 제작한 차트를 이용해서 잘 설명해 주어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 주었다. 중국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노인, 저 출산, 빈부의 격차 등의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과제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6:30 ~ 17:30 산동대학교 가까이 있는 차(茶)상가 방문 및 청과시장을 방문하는 자유 시간을 주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일행 중 몇 분은 100년이나 되었다는 성당에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17:30 저녁식사로서 광동 요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우리들의 입맛에 맞아 모두들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나도 공자 - 중국 체험 문화연수도 받았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벌써 중국 연수 6일째다. 이제 중국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까?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온 대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밤새 비가 내렸고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인가? 내 사는 고국 땅 부산에도 더위를 식히는 비를 흠뻑 뿌려 주었으면.........,
호텔 앞 4거리를 이 호텔 투숙 후 유심히 보았는데 아침마다 잠시 포장마차 촌이 형성되더니 곧 사라진다. 왜 그럴까 하고 궁금해 했더니 누군가가 중국 사람들은 모두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침은 반드시 외식을 하는데, 그 외식을 위한 포장마차라 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07:00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호텔식 뷔페를 먹었다.
09:00 산동대학교로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에 모든 짐을 차에 실었다. 오늘은 웨이팡(유방시)으로 숙소를 옮긴다고 한다. 산동대학교에 도착하니 09:40분경이 되었다.
오늘은 체험 문화연수란다. 공자 옷을 입는 등 공자 체험, 중국 전통 음악 체험, 중국 전통 차 체험을 했다. 강사의 열정적인 설명에 모두들 함께 참여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중국 전통차에는 녹차, 청차. 홍차, 흑차 등이 있다는 것도 이번 체험 연수를 통해 알았으니 이런 것들이 다른 여행에서 볼 수 없는 이번 여행만의 보람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아닌 연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13:40, 산동대학교 내 호텔 뷔페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먹은 후 웨이팡(濰坊)으로 출발했다. 웨이팡시는 중국 최대의 채소 생산지 및 채소 박물관이 있으며 연 예술관과 같은 중국 민속 예술관이 있는 곳이라 했다.
◆ 웨이팡으로 가는 버스에서의 명상
지금 우리 일행은 웨이팡(濰坊)으로 가고 있다.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제법 많다. 또다시 펼쳐지는 중국의 대평원! 너무도 광활하다. 방음용으로 여겨지는 버드나무숲이 30m정도 넓이로 고속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심어져 푸름을 자랑하며 늘어서 있다. 들판의 곡식들이 제 때를 만나 그 기상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한여름, 무더위가 곡식들과 함께 성하(盛夏)의 기운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에어컨 덕분으로 웨이팡시로 가는 버스 속은 시원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따라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대개 트럭은 바퀴가 5줄 18개 달린 대형트럭에 화물을 가득 싣고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불결하고 자동차들도 얼마 없다. 진짜 우리나라 고속도로 화장실은 깨끗하고 시설 좋고 언제 가도 화장지가 준비되어 있는 등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럽다. 장거리 여행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시설도 있으며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 각 종 먹거리로 군것질도 할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 휴게소이다.
눈에 띄는 아파트의 대부분이 신축 중이거나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고층인데 중국은 자기 나라의 땅이 우리나라처럼 좁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 넓은 땅에 그냥 1, 2층으로 짓지? 아파트의 동, 호수나 이름이 눈에 잘 안 띄는데, 아파트의 벽에 큰 글로 아파트 이름이나 동, 호수를 써두면 누가 나무랄까? 일자형이 아닌 입체형 아파트가 대부분인데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하려면 일자형이 좋은데∽. 그건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미적인 것에 우리보다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아파트의 외관(外觀)이 상당히 예쁘다. 우리가 본받아야 되겠지.
차가 밀리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승용차 2대와 버스가 교통사고를 내었구나.
차가 다시 제 속도를 내고 있다. 함께 동행하고 있는 동서대학교 공자 아카데미 김영기 교수가 또 다시 공자의 이야기, 등용문 이야기, 문고리의 물고기 문양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한 입담으로 해주신다. 그 분의 입담과 해박한 지식에 박수를 보낸다.
중국의 간판 글씨 색깔은 대부분 붉은색이고 다음으로 청색, 흑색 순인 것 같다. 그리고 돌출 간판은 거의 없다. 아직 네온 간판이 흔하지 않은 대신 전광판이 많다. 이는 대도시에도 한가지다, 그리고 그들의 교통 안전의식 및 질서 의식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 웨이팡시[濰坊市, WéifāngShì]에서의 신나는 유람(遊覽)
◀야채박물관 엑스포장에서
2016년 8월 2일 화요일, 산둥반도 중부에 있는 웨이팡시의 진명국제대형호텔에서 잠을 잤다. 어제 도착한 웨이팡시는 면적 15,859㎢. 인구 859만(2007)나 되는 대도시였다.
07:00 아침 호텔식 뷔페를 먹은 후 호텔을 한 바퀴 돌면서 산책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차지한 큰 호텔이었다. 09:30, 야채박물관으로 출발했다. 야채박물관을 방문한 후 지난 5월에 있었던 야채박물관 엑스포장에 가니, 아직도 박람회를 열었던 시설들이 남아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중국 고유의 민속적인 것으로 엑스포장을 꾸몄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 나라의 민속적인 특징을 잘 살려 야채로써 엑스포장을 꾸민 것이 이채로웠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으로 꾸민 세트장이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13:30, 호텔 출발하여 웨이팡 과학기술학원종합학교를 방문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동서대학교와 자매학교이기도 한데, 고등학교 과정을 포함한 5년제 전문학교를 비롯하여 4년제 대학 등 다양한 학제의 학교가 있고 대학 관계자들이 너무 친절하여 참으로 고마웠다.
◀ 웨이팡 과학기술학원종합학교에서의 간담회 모습(상)과 대학본부의 모습(하)
웨이팡 과학기술학원종합학교 방문 후에는 마트에 들렀다. 마트가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 웬만한 대형 마트는 저리 가라였다. 그렇지만 그 훌륭한 시설의 대형마트에 화장실 시설은 왜 그렇게도 인색한지!
저녁은 최고급 요릿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맛있게 즐거이 먹었으나 맛과 즐거움에 취해 너무 과음했나? 그 날 저녁 숙소에서 무척 고생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도 한기(寒氣)가 들어 어쩔 줄 몰랐는데 설사까지 겹쳐 너무 괴로운 밤을 보냈다.
◆ 세계 유일의 연박물관을 찾다
2016년 8월 3일 수요일 07;00, 아침식사를 죽 등의 음식으로 때운 덕분에 밤 새 아파 고생했던 기억을 잊고 09:00 이틀간 정든 진명晨鳴호텔과 이별하였다.
오늘은 청도로 가는데, 청도에 도착하기 전에 유방시의 민속촌에 들러 연박물관을 관광하고 점심식사 후 청도로 간다.
◀ 유방시의 연박물관
연의 도시, 연의 고향이라 불리는 유방시의 연박물관에 10:10경 도착하였다. 이 연박물관은 중국 유일의 연박물관으로 1987년 건립했으며 건축면적은 약 8,100㎡라 했다. 매년 4월 말 ~ 5월 초에 열리는 국제 연축제에는 연날리기 대회, 중국 전통 민속공연, 연 공예 미술 축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저런 현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연박물관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단면만 본 것이고 연의 제작, 전시, 판매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과 연에 관련된 많은 건물을 고려할 때, ‘연공원’이라 이름하는 것이 올바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대하고 다양한 연의 고장(庫藏)이었다.
연의 도시, 연의 고향이라 불리는 유방시의 연박물관에 10:10경 도착하였다. 이 연박물관은 중국 유일의 연박물관으로 1987년 건립했으며 건축면적은 약 8,100㎡라 했다. 매년 4월 말 ~ 5월 초에 열리는 국제 연축제에는 연날리기 대회, 중국 전통 민속공연, 연 공예 미술 축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저런 현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연박물관이라 이름 붙인 것은 단면만 본 것이고 연의 제작, 전시, 판매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과 연에 관련된 많은 건물을 고려할 때, ‘연공원’이라 이름하는 것이 올바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대하고 다양한 연의 고장(庫藏)이었다.
◆ 연박물관의 이모저모
12:00 점심을 연박물관 가까운 식당에서 먹고 13:00 청도로 향발하여 16:00에 청도의 숙소 칭다오 력천대형호텔에 도착하였다.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휴식을 취했다.
◆ 육재초급중학교와 Haier 전자 공장이 눈을 의심케 하다
2016년 8월 4일 목요일, 07:00 아침식사 후. 09:00 오늘 투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도 배탈로 무척 고생은 했으나 투어를 포기하지는 않을 정도였는데, 동행한 울산 00고 교장 손** 선생께서는 배탈로 밤새 무척 고생을 하셨고 오늘 투어를 포기할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으신 모양이었다. 가이드가 인원 점검을 하더니 2분이 오늘 투어를 포기하셨다 한다. 2분이 누군가 했더니 손** 교장과 대전서 온 교장 1분이었다. 두 분께서 함께 투어에 참여하지 못 하게 됨을 모두들 안타까워하며 우리만 여정을 시작했다.
청도의 구시가지에서 해저터널을 지나 청도시 황도구로 갔다. 황도구로 가는 도중에 보니 청도의 구시가지 거리는 복잡했고 길은 좁은데 주차 질서까지 문란하여 버스가 참으로 어렵게 통행했다. 청도의 구 시가지와 황도구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은 2010년 10월에 개통되었다고 하는데. 이 터널로 인해서 황도구는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었다. 조선소가 꽉 들어차고 아파트의 신축도 한창인데 맵시 있게 짓는다고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 청도경제개발구육재초급중학교 정문 앞에서
먼저 청도경제개발구육재초급중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시설의 훌륭함에 갑자기 눈이 둥그레졌다. 들어가는 입구의 강당으로부터 박물관, 도서관, 서예실, 미술실 등등 어느 것 하나도 나무랄 것 없는 설계와 시공으로 교육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시설을 갖춘 학교가 없을 듯 했다. 학교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의 친절한 설명과 안내를 받고 12:00 황도구청 옆에 있는 영빈관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13:30 점심 후 다음 목적지로 가면서 유심히 보았더니 신호등 체계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량이 통행하는 푸른 신호등에도 00초 후에 신호등이 바뀐다는 안내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어 우리나라처럼 노란 등으로 바뀔 때 통과하는 차량은 훨씬 줄어들 것 같았다.
14:30 Haier 전자 공장에 도착했다. 체계적이고 멋진 홍보관이 우리를 맞았다. 안내자의 상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이 이 회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게 했다.
1996년 쓰촨의 농민 한 명이 하이얼 세탁기의 배수관이 막혔다고 신고했다. 서비스 담당직원이 수리를 해보니 고구마가 배수관에 걸려 있었다. 당시 대부분 중국 농민들이 고구마를 세탁기에 씻었다. 이 사실에 착안해 하이얼은 1998년 고구마 전용 세탁기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창업 초기부터 회사를 이끌었던 장루이민(張瑞敏) 회장의 필사의 각오가 오늘날 하이얼 그룹이 있게 했다는 일화 등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여실히 깨달게 해주었다.
하이얼 그룹은 1984년 창업한 회사로서 처음에는 칭다오 냉장고 공장으로부터 지금은 세계에서 연 매출 1위의 전자회사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 하이얼 그룹의 본사가 있는 칭다오에 방문함으로써 삼성과 LG전자에 안주하고 있는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나의 안목에 경종을 울렸다고나 할까? 하여튼 하이얼그룹의 무한 질주에 경의를 표한다.
18:00 호텔에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걸어가서 저녁식사를 즐겼다. 이 밤이 이번 중국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저녁 식사 후 발 마사지를 받고 호텔 부근 맥주 집에서 맥주잔을 기울면서 중국 청도의 마지막 밤을 정담을 나누며 밤이 늦도록 지켜보았다.
◆ 청도여, 중국이여, 안녕!
2016년 8월 5일 금요일, 오늘은 고국,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9박 10일간의 중국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운 것이 많다. 그리고 중국 산동대학교 관계자들의 후한 배려에 감사드린다.
중국과 우리는 먼저 이웃으로서 지리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깝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곡부에서 공자의 여러 유적지를 보고 역시 동양사상의 발원지는 여기로구나 했고 태산에 오르면서 실제의 태산은 세계 최고(最高)의 산이 아니면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높은 산이 태산으로 여겨진 것을 알겠더라.
2004년 처음으로 중국 장가계, 원가계, 서안 북경을 여행한 지 12년, 그 동안 중국은 정말 변해도 크게 변했다. 눈부시게 발전했다. 2004년 당시만 해도 미개인의 나라로 여겨지던 중국이 이제 세계 최고의 산업국으로 국민 소득에서도 괄목상대(刮目相對)해야 할 정도로 높아졌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외국 여행에 홍수를 이루던 10여 년 전에 그들은 우리를 그저 부러운 눈으로 보고 맞이하기에 바빴으나 이제는 세계 각국을 누비며 돈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은 중국인이라고 할 정도로 변했다.
이번 여행에서 중국은 그 넓은 국토만큼이나 인구도 많아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의 여지가 있음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또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있음도 보았다. 특히 청도경제개발구육재초급중학교에 투자한 물질적 정신적 비용은 중국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본보기로 여겨졌다.
이번 우리 일행의 연수는 중국의 국비로 자기 나라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서 베풀어진 것이다. 그만큼 대국적 견지에서 자국의 우수함을 드러내고 장래를 위한 포석, 세계 제일의 국가를 지향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이러한 정책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현실화 시켜보자고 다짐해 본다. 아울러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즉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한 구절을 되새기며 이번 연수에 참가하게 된 의의(意義) 남긴다.
10:00 버스로 청도 류팅공항으로 이동했다.
13:30(중국시간) 부산으로 향하는 KE890 편 대한항공은 손님을 가득 태우고 류팅공항을 이륙하여 16:10경 부산 김해공항에 착륙했다. 고맙고 반갑다. 나의 조국이여! 이제 여권이나 비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
끝으로 9박 10일간 함께 하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말을 전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